[동성애]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동성애-사랑의 일탈인가? 또 하나의 사랑인가?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와 같은 민감한 주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에 속한다.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동성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부담스럽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과거에 비해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점차 강해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잣대를 가지고(이를테면, 종교적 잣대) 동성애에 대하여 함부로 이야기했다가는 인권의 ‘인’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매도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근래 모방송국에서 방영한 가족 드라마 두어 편이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전환점처럼 보이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필자는 그동안 글과 방송을 통해 서너 차례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온라인과 오프 라인 상에서 몇 차례 곤혹스러운 일을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다시금 이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기까지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주지하듯이 동성애는 자신의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에 대한 혼란을 겪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와는 다르게, 성 지향성(sexual orientation)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인 지향성을 갖는데 반해 동성애는 같은 성에게 성적인 지향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동성애자 스스로도 자신들이 일반적인 성적 지향성과는 다르다고 해서 일반이 아닌 ‘이반(二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지난 2000년 9월에 있었던 연예인 홍모씨의 커밍 아웃(coming out)사건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전통적으로 동성애를 금기시해 온 우리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고, 이후 동성애 찬성론자와 반대론자들 간의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필자의 견해로, 동성애 논쟁의 초점은 동성애가 ‘사랑의 일탈현상인가? 아니면 사랑의 또 다른 유형인가’에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까지만 동성애라는 말조차 떠올리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당시는 동성애자들조차도 스스로 자신이 잘못된 성적 지향성을 가지고 태어난 일종의 정신질환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전통적인 관습과 가치체계에 저항하거나 거부하는, 이른 바 포스트 모던적인 경향으로 인해 과거의 비(非), 반(反), 타(他)에 속했던 문화현상들이 하나 둘씩 복권되면서, 언더 그라운드에 숨어 있던 동성애도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이성애란 단지 과거의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에 기초한 일부일처제의 산물일 뿐, 인간의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제도가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개인의 감정에 달린 문제이다. 그렇다면, 결국 동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성의 일탈이나 정신적 질병이 아닌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이며, 억압되어온 인간의 성과 사랑에 대한 해방인 셈이다.
그러나 종교계를 비롯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쪽의 입장은 동성애자, 또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이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동성애가 하나님이 부여한 성과 사랑에 대한 창조질서 및 신성한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한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여자)와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도록 했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가 1:1로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남자와 여자가 결합한 가정을 만들었을가? 그 이유는 생육과 번성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지속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성서를 믿는 기독교의 입장이지만, 모든 만물이 음양의 조화에 의해 생겨난다는 동양의 음양오행설도 이 주장과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와 같은 이유로 해서 동성애는 하나님이 부여한 가정의 해체와 인류의 존속에 중대한 위협이 되므로 정죄(定罪)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동성애의 발생 요인을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이라고 믿고 있다. 동성애자들이나 또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의 주장처럼 만약 동성애가 개인의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타고난 것이라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이를테면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성을 타고났다면, 과연 동성애는 누구의 책임인가? 하나님의 책임이 될 수도 있지 않는가? 아니면 동성애 성향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든지 말이다. 그러므로 선천적인 성적 지향성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성적 소수에 대한 인권유린이며, 개인의 성적 경향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보수적 입장은 동성애의 선천성을 부정하고 후천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진보적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연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데, 지난 1991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라호야(La Jolla)에 있는 솔크 연구소(Salk Institute)에서 뇌의 시상하부에 있는 INAH3라는 핵을 연구한 결과 일반적으로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에 비해 시상하부의 INAH3라는 핵이 작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리고 해머(Dean Hamer) 박사와 그의 연구진들은 동성애자들의 가계를 조사함으로써 동성애의 유전적 가능성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하지만 두 연구 모두 동성애의 유전자설에 대한 가능성만 확인했을 뿐 확실한 증거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설혹 유전적 가능성이 실제적으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동성애를 사랑의 다른 유형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들도 적지 않다.
동성애자의 인권문제는 따로 둔다면, 필자 역시 동성애를 반대하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그것은 필자가 가진 특정 종교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동성애가 후천적일 가능성이 높은 많은 자료들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마빈 해리스의 책 『작은 인간』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흥미 있는 인류학적 기술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해리스는 몇 가지 동성애 유형을 제시하고 있는데, 남부 수단의 아잔데(Azande) 족의 전사(戰士)들은 성적욕구와 군사 기술의 전수를 위해 남성끼리의 동성애(게이Gay)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카리아코우>의 <카리비안> 섬 여자들은 남자들이 일년중 대부분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기 때문에, 남편이 없는 동안 나이 든 부인들이 어린 부인들을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또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리는 일부다처제가 부인들간의 레즈비언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는 보고도 있다. 이와 같은 경우, 남성끼리의 동성애나 여성끼리의 동성애는 주로 상대 성이 결핍 된 상태에서 성적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철학적 명분을 가진 동성애도 존재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등 유명한 그리이스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향연;Symposium』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자와 동침하면 육체를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는 명분을 가지고 동성애를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시베리아 남자 샤먼들이나 아프리카의 정령의식을 행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종교-의식적 명분을 가지고 행해진 동성애도 존재했다.
현대 정신분석학적인 이론(Psychoanalytic theory)도 동성애의 후천적 발생을 지지하고 있다. 프로이드는 동성애의 가능한 원인으로서 부모와 자녀 간의 왜곡된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임상적인 관찰에서 그는 동성애의 전제 조건으로서 거부적이거나 적의에 찬 엄마와 수동적인 아버지를 지적하였다. 비버(Bieber)도 같은 주장을 했는데, 즉 "아버지는 아들이 동성애자가 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는 아주 무관심하고 적대적이었다........동성애 아들을 가진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소유욕이 강하다." 그러니까 무관심하고 적대적인 아버지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화하려는 열망이 좌절되고, 다른 남성를 향한 두려움과 갈망을 가지게 되며,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자아이는 완전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출 기회를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동성애가 발행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의 후천적 발생 또는 확산에는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책임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가 공론화 된 이후 매스미디어는 대부분의 경우 동성애를 미화시키는 작업에 더 열중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불식시키거나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일방적으로 동성애에 대하여 호의적 감정을 보이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어 보인다. 즉 매스미디어의 생리상, 매체 소비자의 눈과 귀를 묶어 두기 위해서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가 아니라 보다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중들은 매스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남녀간의 격정적인 사랑에 식상한지 오래고, 한동안 거세게 불던 불륜 바람도 잠잠해졌다. 매스미디어의 생존법칙은 “감정자극의 에스칼레이팅 법칙”이 아닌가? 그래서 매스 미디어는 좀더 자극적이면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소재로 동성애에 일부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소재가 신선한 만큼 접근방식도 신선해야 한다. 그리고 매스미디어에서 신선한 것은 곧 충격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과거의 통념을 뒤집어엎고, 아닌 것을 맞다고 해야 하고, 옳다고 여겨온 것을 아니라고 해야 한다. 매스미디어는 이와 같은 메카니즘을 통하여 동성애를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의 미디어 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이자, 맛사지’라고 했다. 그만큼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더욱이 영상매체 시대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한 청소년들은 미디어와 거기에 등장하는 인기연예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 환경 하에서 동성애가 매스미디어에 의해 끊임없이 미화되고 있는 현실이라면, 어떻게 청소년들이 동성애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겠으며, 특별히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번쯤 동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품을 만한 청소년의 시기에 성적 지향성에 대한 혼란을 경험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 성향이 자의적이 아니라는 다수 동성애자들의 고백과 또한 그들의 아픔에 대하여 필자 한국 교회가 공감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다만, 교회가 어떤 문화현상에 대하여 시대가 바뀌었다고 성경적 세계관을 쉽게 포기하고, 너무 낭만적이고, 획일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태도는 경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