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담배 문제를 이렇게 접근하면 어떨까요?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의 금기가 되어온 술 담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 대답은 늘 이런 식입니다.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니까 해로운 술이나 담배를 몸에 넣어 성전을 더럽히면 되겠느냐?" 아니면 알콜과 담배가 얼마나 몸에 해로운가에 대한 여러 가지 수치들을 보여주면서 겁을 주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대답만으로는 영 시원치 않습니다. 우리 몸에 술 담배만 해롭냐고 반문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좀 더 현실적인 반문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산다면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가 변했으면 기독교인들도 지나친 금욕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라고까지 말합니다.
한편으로 술·담배를 신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도 있습니다.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는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냐는 것입니다. 태국에 다녀온 어떤 신학자의 말씀을 빌자면 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가 술·담배를 금하는 것처럼 커피를 금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목사님의 심방때에 단골로 나오는 것이 커피인데,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의문도 가질 법합니다. 비단 술·담배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세상 속에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화적 문제로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자! 이야기를 풀어갑시다. 술에 대한 성경구절은 많이 있지만, 우리가 금하는 담배에 대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렇듯이 성경은 한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적인 문제들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성경이 시시콜콜 한 시대의 문화들에 대하여 일일이 답변하고 있다면 성경은 단지 66권으로 끝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모든 인류의 역사와 문화적인 문제들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무슨 그런 이율배반적인 말씀을 하느냐고요?
그 말씀은 성경이 컴퓨터, 인터넷과 같은 표현은 없어도 그런 문화적인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과 더불어 초문화적이며 초시간적으로 계시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성도들의 삶의 지침과 기준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적인 금기로 삼고 있는 것들 중에는 그야말로 "문화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술·담배를 엄격히 금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강제된 전통이란 말씀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입는 예복을 생각해봅시다. 서구인들이 교회갈 때 양복입는다고 우리도 양복입고 가야 거룩하고 경건하고 우리 전통의상을 입고가면 불경건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무얼 먹고 입고 마시는 가의 문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원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위 "아디아포라"의 문제입니다. 아닌 말로 우리 기독 청소년들이 요즘 유행하는 테크노 댄스곡을 한 곡 뽑았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주 한잔 들이켰다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연기를 뿜었다고 지옥불에 떨어지는게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지 우리의 삶의 양식이나 방식이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난 기독교인의 자유는 세상의 그 어떤 제약과 조건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것은 유대 율법과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며 서구 기독교문화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 자유를 설명하기 위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 전도를 계기로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거두절미하고 그 공의회의 결론은 성령과 요긴한 것들 외엔 아무 짐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지우지 않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의 문화와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임을 선언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8장의 말씀을 죽 살펴보면, 음식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들 먹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을 권, 마실 권,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 그리고 육신의 것을 거둘 수 있는 권리도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쯤 되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못 먹을 음식이 없고, 못할 일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구원과 무관한 <아디아포라>의 문제들에 관한 한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의 선언처럼 대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술 한잔, 담배 한 개비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한 구절만 가지고 이해해서는 큰일납니다. 진리로 우리가 대자유인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우상의 제물을 마음대로 먹고, 술과 담배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크게 따질 것 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지, 방종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빛된 자녀로서 세상문화와 구별되어야 함을 성경은 언제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성경말씀을 통해 구한 구별의 준거들을 가지고 왜 우리가 술·담배와 같은 문화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의 자유가 절제되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갈 5:13절 참조). 여기서 육체의 기회란 육체의 소욕 즉,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상당히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 하나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교만한 지식(고전 8:1절 참조)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믿음을 은혜로 간직하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지지해주는 변명거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술 한잔 쯤이야 어때? 그렇다고 내가 주님을 믿지 않는게 아니니까" 그러다가 정말 주님이 술 주자 주님(酒)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자유로 말미암아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고전 8:9절 참조). 술과 담배는 대한민국의 기독교 100년사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엄격한 금기문화가 되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한국에서 형성된 독특한 문화적 문제라 할 지라도 비기독교인들과 그리고 기독교인들 중에서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이 술과 담배를 절제하는 데서 기독교신앙의 구별성을 찾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위해서 우리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 이렇게 되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구원과 무관한 문화적인 문제라면 그 전통을 깨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론 그게 긍정적인 전통이 아니라 부정적인 인습이라면 당연히 깨 버려야지요. 하지만 술·담배의 해악성은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인정하는 바, 술·담배를 절제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문화사에 훌륭한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문화는 철저하게 이타주의 문화입니다. 나보다는 하나님을, 나보다는 이웃과 믿음의 형제 자매를 먼저 생각하는 문화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술 한잔 먹을 수 있고, 담배한 개비 피워도 아무런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라 할 지라도 마땅히 내 이웃을 위하여, 믿음이 연약한 형제 자매를 위하여 절제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닌 말로 목사님이, 장로님이, 청년회 회장이 자신의 자유함과 믿음의 담대함을 내세워 술을 퍼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길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거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 자신의 자유함으로 말미암아 혹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고전 8:13절 참조)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은 남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합니다(고전 10:23, 24절). 자신에게 아무리 유익한 일일지라도, 그게 설사 영적인 일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과 덕을 세울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자유는 스스로 절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 같은 신령한 은사일지라도 남을 배려하는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술 담배처럼 자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거부감과 건강을 해치는 것들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유함을 빌미로 절제하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넷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2:16절 참조). 만약 우리의 자유가 악을 짓고 가리우는데 사용되어진다면 우리는 이미 어두움의 문화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그리고 육체의 권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참의미는 무엇보다 죄악가운데서 해방되는 영적인 자유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 은혜로 주어진 자유를 악을 짓고 가리우는데 사용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점점 대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매스컴을 통해 익히 알 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실도 바로 믿음으로 얻은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주님이 명령하신 선교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의 자유는 스스로 포기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절)고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언어행실을 고집한다면 누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며, 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겠습니까?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될 것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잦은 술자리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꼭 함께 술을 마신다고 분위기
를 살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세상문화에 단호해질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그들과의 교제가 불가능할 것이란 두려움은 가지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면서도 충분히 지혜롭게 그들과의 교제가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여러분들이 그런 모습을 가질 때 그들은 예수를 알려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신앙을 자랑할 때,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여는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타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어설픈 자유함의 지식을 가지고 술과 담배로 인해 양심의 상처를 입고 악을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인은 말입니다. 자신의 자유함을 방종으로 발산하는 자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기꺼히 포기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유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